<이번 주 원주 클라우드는 클라우드 게시판에 띄운 주제에 남겨주신 댓글들로 키워드를 뽑았습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가영, sj, 부탄가스, 김민지, 권수진, 유리, 아몬드, 유한솔, 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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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스승의 도시]
원래 오늘 칼럼은 날콩이 작가님의 차례였습니다만, 주제를 확인한 날콩이 작가님이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원주의 자랑거리’라니, 그럴 만한 질문이었죠.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자랑’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이나 물건·일 따위가 썩 훌륭하거나 남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임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거든요. 참고로 자랑은 순우리말입니다. 어원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스스로 자(自)’에 ‘우러를 앙(仰)’에서 왔을 것이라는 한 블로거의 추측⑴이 퍽 합리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자랑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기 자신’인 거죠. 자랑한단 행위는 자기 자신 또는 그에 준할 정도의 일체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섬 출신으로 원주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콩이 작가님과, 원주에서 초·중·고·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껏 살아온 제가 느끼는 친밀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느 때보다 클라우드에 모인 단어가 적고 대부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도, 같은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원주의 인구 비율을 생각해 보면, ‘원주롭다’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대부분 이주민일 테니까요. 20년 넘게 원주에서 보낸 저조차도 사실은 어린 시절 이주해온 외지인이거든요. 저는 원주를 ‘내 고장’이라 여기는 데에 온 20대가 걸렸습니다.
예로부터 원주는 교통의 요지로 인구 이동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는 세곡을 거두는 ‘흥원창’이 있었는데, 이곳의 지명 부론(富論)은 사람이 워낙 많아 말[論]이 풍부하게[富] 오간다는 뜻에서 유래했을 정도죠. 수운이 육로로 바뀌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앙선 철로가 놓이고, 한국전쟁 이후론 1군사령부가 들어왔고요. 연세대학교 오영교 교수가 쓴 「지역학 연구와 원주학」에 따르면 1998년 12월 기준 원주시민 26만여 명 중 토박이 인구는 3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원주 인구는 10만 명이 늘었지만, 이중 자연 인구 증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들어서며 외부 인구 유입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죠. 2019 원주통계연보에 따르면 한 해 동안에만 3만 5천여 명이 원주로 이주해왔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대가족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나 바깥의 무언가에 일체감을 느끼는 경험은 그 자체가 드물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BTS’의 빌보드 등극이나 ‘오징어게임’의 선전에 ‘주모’를 소환하며 ‘국뽕 한 사발’을 들이켜는 경우도 있지만, 그만큼 반발도 심하잖아요. 개인화된 시대에서 우리 동네, 우리 도시, 우리나라에 일체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워 하는 행위는 어쩐지 ‘촌스러운’ 과거의 유물 같기도 합니다. 혹은 예전의 전체주의적 강압을 떠올리게도 되고요.
우리 도시(혹은 내가 사는 도시)의 자랑거리를 생각하다 너무 멀리 왔네요. 다시 돌아가죠. 토박이가 적고 지역색이 옅다는 건 텃세가 없고 개방적이라 이주민이 살기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클라우드에서도 이런 내용이 많이 드러나더군요.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도시와 시골의 공존, 아름다운 자연. 과연 ‘도시적’ 시선이 섞여 있습니다. 별다른 비교군이 없는 20년 원주민(?)으로서는 ‘자연재해가 없는 평화로운’ 도시라는 표현이 공감되었고요.
저도 제법 고민해 보았습니다. 먼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 이를테면 ‘쌍동통닭’의 통닭이나 ‘거돈사지’의 고즈넉함, ‘성황림’의 신비로움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좀 더 나아가, 우러를[仰] 것을 꼽아보려니 아무래도 물질적인 것보다 뭐랄까, 정신적인 면을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결국 앞서간 사람이겠죠. 자연스레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김금원으로 더 널리 불리는 금원 김 씨(1817년~?)와 무위당 장일순(1928~1994)입니다. 각기 시대에 좌절하지 않았던 선구자와, 미래를 내다보았던 선지자라 할 수 있겠죠. 원주가 탁월한 시인과, 훌륭한 스승의 도시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두 분을 알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맺어 보렵니다.
⑴ 네이버 블로그 ‘호작질 연구소’ 포스팅 중 ‘“자랑하다”의 어원’ (https://blog.naver.com/jjl071777/221198107943)
새보미야 |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______한 사람. 프로 백수라 불리곤 하는 프리랜서로, 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가영, sj, 부탄가스, 김민지, 권수진, 유리, 아몬드, 유한솔, 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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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스승의 도시]
원래 오늘 칼럼은 날콩이 작가님의 차례였습니다만, 주제를 확인한 날콩이 작가님이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원주의 자랑거리’라니, 그럴 만한 질문이었죠.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자랑’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이나 물건·일 따위가 썩 훌륭하거나 남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임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거든요. 참고로 자랑은 순우리말입니다. 어원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스스로 자(自)’에 ‘우러를 앙(仰)’에서 왔을 것이라는 한 블로거의 추측⑴이 퍽 합리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자랑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기 자신’인 거죠. 자랑한단 행위는 자기 자신 또는 그에 준할 정도의 일체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섬 출신으로 원주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콩이 작가님과, 원주에서 초·중·고·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껏 살아온 제가 느끼는 친밀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느 때보다 클라우드에 모인 단어가 적고 대부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도, 같은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원주의 인구 비율을 생각해 보면, ‘원주롭다’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대부분 이주민일 테니까요. 20년 넘게 원주에서 보낸 저조차도 사실은 어린 시절 이주해온 외지인이거든요. 저는 원주를 ‘내 고장’이라 여기는 데에 온 20대가 걸렸습니다.
예로부터 원주는 교통의 요지로 인구 이동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는 세곡을 거두는 ‘흥원창’이 있었는데, 이곳의 지명 부론(富論)은 사람이 워낙 많아 말[論]이 풍부하게[富] 오간다는 뜻에서 유래했을 정도죠. 수운이 육로로 바뀌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앙선 철로가 놓이고, 한국전쟁 이후론 1군사령부가 들어왔고요. 연세대학교 오영교 교수가 쓴 「지역학 연구와 원주학」에 따르면 1998년 12월 기준 원주시민 26만여 명 중 토박이 인구는 3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원주 인구는 10만 명이 늘었지만, 이중 자연 인구 증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들어서며 외부 인구 유입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죠. 2019 원주통계연보에 따르면 한 해 동안에만 3만 5천여 명이 원주로 이주해왔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대가족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나 바깥의 무언가에 일체감을 느끼는 경험은 그 자체가 드물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BTS’의 빌보드 등극이나 ‘오징어게임’의 선전에 ‘주모’를 소환하며 ‘국뽕 한 사발’을 들이켜는 경우도 있지만, 그만큼 반발도 심하잖아요. 개인화된 시대에서 우리 동네, 우리 도시, 우리나라에 일체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워 하는 행위는 어쩐지 ‘촌스러운’ 과거의 유물 같기도 합니다. 혹은 예전의 전체주의적 강압을 떠올리게도 되고요.
우리 도시(혹은 내가 사는 도시)의 자랑거리를 생각하다 너무 멀리 왔네요. 다시 돌아가죠. 토박이가 적고 지역색이 옅다는 건 텃세가 없고 개방적이라 이주민이 살기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클라우드에서도 이런 내용이 많이 드러나더군요.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도시와 시골의 공존, 아름다운 자연. 과연 ‘도시적’ 시선이 섞여 있습니다. 별다른 비교군이 없는 20년 원주민(?)으로서는 ‘자연재해가 없는 평화로운’ 도시라는 표현이 공감되었고요.
저도 제법 고민해 보았습니다. 먼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 이를테면 ‘쌍동통닭’의 통닭이나 ‘거돈사지’의 고즈넉함, ‘성황림’의 신비로움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좀 더 나아가, 우러를[仰] 것을 꼽아보려니 아무래도 물질적인 것보다 뭐랄까, 정신적인 면을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결국 앞서간 사람이겠죠. 자연스레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김금원으로 더 널리 불리는 금원 김 씨(1817년~?)와 무위당 장일순(1928~1994)입니다. 각기 시대에 좌절하지 않았던 선구자와, 미래를 내다보았던 선지자라 할 수 있겠죠. 원주가 탁월한 시인과, 훌륭한 스승의 도시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두 분을 알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맺어 보렵니다.
⑴ 네이버 블로그 ‘호작질 연구소’ 포스팅 중 ‘“자랑하다”의 어원’ (https://blog.naver.com/jjl071777/221198107943)
새보미야 |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______한 사람. 프로 백수라 불리곤 하는 프리랜서로, 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