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원주 클라우드는 클라우드 게시판에 띄운 주제에 남겨주신 댓글들로 키워드를 뽑았습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정윤주, 김지영, 이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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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아닌 서로에게 닿기]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조세희의 소설입니다. (요즘 교육과정에서도 「난쏘공」을 배우나요?) 소설에서 난쟁이(아버지)는 달로 공을 쏘아 올리고자 하지만 지구에서 쏘아 올리는 공은 중력으로 인해 언젠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야 맙니다. 「난쏘공」은 ‘난쟁이’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것은 쇠공이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것만큼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예상치 못한 거대한 반응을 일으키거나 논의를 촉발시킬 때 ~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소설의 제목이 어쩌다 이런 표현으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찾을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용례를 찾아볼 수 있었답니다. 예를 들면, Z세대가 환경 이슈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시작한 것에 대하여 ‘툰베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표현한달지, 거의 외면 받고 지나갔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주목(?) 받게 된 근래의 상황들을 ‘이준석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이런 ‘나비효과’ 혹은 ‘누군가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같은 표현은 행위자가 혼자 상상하고 의도했던 바를 넘어서는 큰 흐름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이름이 붙여집니다. 애초에 계획하거나 예상했던 대로 흘러갈 수 없어야 하고, 예측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규모의 대중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모여 어떤 흐름을 만들어낼 때, 결국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적어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진행 상태에서)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사실 툰베리도, 이준석도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하고 전략을 세워 계획한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이끌어낼지는 준비하는 사람들도 미지수인 것입니다.
세계, 혹은 국가적인 차원 말고 우리의 일상과 삶의 차원으로 규모를 줄여보겠습니다. 일상에서 무심코 내린 결정이 하루를-혹은 인생을 바꾸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집어든 책 속에서 인생을 바꿀 이야기를 만나기도 하고 무심코 들어선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최애 음악이 되기도 하죠. 무심코 들어선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에게 간택을 받는 경험도 인생이 바뀌는 일이 될 겁니다. (맞습니다. 제 소원입니다.) 작은 습관도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쌓이면 성공적인 인생, 혹은 파괴적인 인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겠지요. ‘달리기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혹은 ‘지속적인 야근이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요! (야근은 필요할 때만! 정시퇴근하고 달립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무심코 던진 농담으로 인해 사상을 의심받고 인생이 꼬여버리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우리의 삶이 소설에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무너지지 않길 바랍니다만) 저도 최근 ‘왜 전교조 같은 나쁜 사람들을 만나냐’는 말에 순간적으로 ‘태생부터 빨갱이*라서요’라고 농담을 던졌다가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는 상황에 진땀을 흘렸답니다. (전교조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스스로를 괴롭히는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들도 있죠. ‘전교조는 나쁜 놈들’이라거나 ‘세월호는 교통사고’ 라거나 (저희 어머니가 저랑 싸우다 홧김에 그만….) 나이가 어리다고 무심코 반말을 한다거나 (초등생 수업을 진행하다 저도 모르게 그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고 무심코 얼굴을 찡그린다거나 케인을 짚고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거나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키즈존 표지판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조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준서야! 이모가 사랑한다!) 일상의 공간으로 무대가 좁아지니 우리 스스로의 마음이 불편해진 자세를 다잡으며 꼼지락 거리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글을 쓰면서 보니, 우리가 무심코 뱉은 말과 무심코 하는 행동의 결과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무심코-가 붙는 행위는 Action-외부 자극에 대한 Reaction-반응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의식에 새겨진 익숙함을 흔드는 외부 자극에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죠. 그래서 제안해 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점을 선으로 뻗게 할 힘이 있다면, 우연히 ‘무심코’하는 행위에 기대기보다 일부러 ‘공들여’ 하는 행동으로 그 힘을 키워 나가자고요. 우리는 완전무결하거나 순수해서 티 없이 맑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실수도 하고 편견에 갇혀 있기도 하고 가끔 거짓말도 하고 약속을 못 지키기도 하죠. 우리가 씨앗이라면, 창의적이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가지만을 뻗을 순 없을 겁니다.
우리 각자가 점이고 서로 이어져 선이 된다면, 하나의 점에 불과한 저에게, 선으로 뻗어나갈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애써 여러분들과의 연결점을 찾아 공들여 뻗은 가지를 살포시 겹쳐 보는 것뿐일 겁니다. 못난 가지는 매번 쳐내고 잘라낼 필요 없이 그냥 두어도 괜찮겠죠? 혹시 제 못난 가지와 연결될 다른 나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쏘아 올린 공이 우연히 달에 닿기를 기대하기보다 서로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를 뻗어 점에서 선이 되고, 선에서 거대한 숲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해방 이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제주를 미군정이 ‘Red island’로 명명하면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집단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답니다.
날콩이 | 강원도에 살래 온 섬따이 이우다. 자주 보게 마씀~ (강원도에 이주한 섬 아이 입니다. 자주 보아요~)
참여해주신 분들: 정윤주, 김지영, 이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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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아닌 서로에게 닿기]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조세희의 소설입니다. (요즘 교육과정에서도 「난쏘공」을 배우나요?) 소설에서 난쟁이(아버지)는 달로 공을 쏘아 올리고자 하지만 지구에서 쏘아 올리는 공은 중력으로 인해 언젠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야 맙니다. 「난쏘공」은 ‘난쟁이’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것은 쇠공이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것만큼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예상치 못한 거대한 반응을 일으키거나 논의를 촉발시킬 때 ~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소설의 제목이 어쩌다 이런 표현으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찾을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용례를 찾아볼 수 있었답니다. 예를 들면, Z세대가 환경 이슈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시작한 것에 대하여 ‘툰베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표현한달지, 거의 외면 받고 지나갔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주목(?) 받게 된 근래의 상황들을 ‘이준석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이런 ‘나비효과’ 혹은 ‘누군가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같은 표현은 행위자가 혼자 상상하고 의도했던 바를 넘어서는 큰 흐름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이름이 붙여집니다. 애초에 계획하거나 예상했던 대로 흘러갈 수 없어야 하고, 예측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규모의 대중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모여 어떤 흐름을 만들어낼 때, 결국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적어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진행 상태에서)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사실 툰베리도, 이준석도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하고 전략을 세워 계획한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이끌어낼지는 준비하는 사람들도 미지수인 것입니다.
세계, 혹은 국가적인 차원 말고 우리의 일상과 삶의 차원으로 규모를 줄여보겠습니다. 일상에서 무심코 내린 결정이 하루를-혹은 인생을 바꾸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집어든 책 속에서 인생을 바꿀 이야기를 만나기도 하고 무심코 들어선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최애 음악이 되기도 하죠. 무심코 들어선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에게 간택을 받는 경험도 인생이 바뀌는 일이 될 겁니다. (맞습니다. 제 소원입니다.) 작은 습관도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쌓이면 성공적인 인생, 혹은 파괴적인 인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겠지요. ‘달리기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혹은 ‘지속적인 야근이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요! (야근은 필요할 때만! 정시퇴근하고 달립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무심코 던진 농담으로 인해 사상을 의심받고 인생이 꼬여버리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우리의 삶이 소설에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무너지지 않길 바랍니다만) 저도 최근 ‘왜 전교조 같은 나쁜 사람들을 만나냐’는 말에 순간적으로 ‘태생부터 빨갱이*라서요’라고 농담을 던졌다가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는 상황에 진땀을 흘렸답니다. (전교조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스스로를 괴롭히는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들도 있죠. ‘전교조는 나쁜 놈들’이라거나 ‘세월호는 교통사고’ 라거나 (저희 어머니가 저랑 싸우다 홧김에 그만….) 나이가 어리다고 무심코 반말을 한다거나 (초등생 수업을 진행하다 저도 모르게 그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고 무심코 얼굴을 찡그린다거나 케인을 짚고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거나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키즈존 표지판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조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준서야! 이모가 사랑한다!) 일상의 공간으로 무대가 좁아지니 우리 스스로의 마음이 불편해진 자세를 다잡으며 꼼지락 거리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글을 쓰면서 보니, 우리가 무심코 뱉은 말과 무심코 하는 행동의 결과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무심코-가 붙는 행위는 Action-외부 자극에 대한 Reaction-반응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의식에 새겨진 익숙함을 흔드는 외부 자극에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죠. 그래서 제안해 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점을 선으로 뻗게 할 힘이 있다면, 우연히 ‘무심코’하는 행위에 기대기보다 일부러 ‘공들여’ 하는 행동으로 그 힘을 키워 나가자고요. 우리는 완전무결하거나 순수해서 티 없이 맑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실수도 하고 편견에 갇혀 있기도 하고 가끔 거짓말도 하고 약속을 못 지키기도 하죠. 우리가 씨앗이라면, 창의적이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가지만을 뻗을 순 없을 겁니다.
우리 각자가 점이고 서로 이어져 선이 된다면, 하나의 점에 불과한 저에게, 선으로 뻗어나갈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애써 여러분들과의 연결점을 찾아 공들여 뻗은 가지를 살포시 겹쳐 보는 것뿐일 겁니다. 못난 가지는 매번 쳐내고 잘라낼 필요 없이 그냥 두어도 괜찮겠죠? 혹시 제 못난 가지와 연결될 다른 나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쏘아 올린 공이 우연히 달에 닿기를 기대하기보다 서로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를 뻗어 점에서 선이 되고, 선에서 거대한 숲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해방 이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제주를 미군정이 ‘Red island’로 명명하면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집단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답니다.
날콩이 | 강원도에 살래 온 섬따이 이우다. 자주 보게 마씀~ (강원도에 이주한 섬 아이 입니다. 자주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