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원주 클라우드는 클라우드 게시판에 띄운 주제에 남겨주신 댓글들로 키워드를 뽑았습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김민지, 가영, 김대규, 유미, 찐빵, 은비, 김유리, 유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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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쏘울’이 담긴 곳, 시내]
원주는 어떤 도시일까요? 원주에서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졸업한 저는 종종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에게 원주를 소개할 일이 생기곤 했습니다. 치악산과 은혜 갚은 꿩의 전설, 군사도시, 특산품 복숭아와 배. 그렇지만 이것들은 막상 춘천 닭갈비, 안동 하회마을, 나주 곰탕, 전주 한옥마을 등에 비하면 ‘전국구’(?) 임팩트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군가는 원주를 ‘무색무취의 도시’라고도 일컫더군요.
수년 간 프리랜서로 원주 곳곳을 다니면서는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5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강원감영과 선화당(宣化堂), 6·25 전쟁의 향방을 갈랐던 원주전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였던 원주캠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작, 생명사상과 협동조합 운동, 미군부대 캠프롱과 나환자 정착촌 대명원의 축산단지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원주식 통닭….
원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중앙동 원도심, ‘원주민’들에게는 ‘시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시내가 원주의 중심지가 되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옛적엔 원주천 배말까지 장삿배와 소금 배가 들어왔고, 원주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있어 농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죠. 태조 4년(1395) 강원감영이 설치되었고, 주변에는 백성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가 모이니 장시(場市)가 섰고요.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부터 원주 읍내장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읍내장은 오늘날까지도 풍물시장 민속 오일장으로 건재하죠. 조금 더 북서쪽, 지금의 국민은행 인근에서는 우시장(牛市場)이 열렸는데, 이 때문에 인근에 한우 골목이 형성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북적였던 원주 시내는 6·25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고 맙니다. 치열했던 원주전투의 여파로 강원감영은 선화당과 포정루만 남았고, 원주역도 원동성당도 원주극장도 모두 파괴되었죠. 이후 1군사령부와 미군부대 캠프롱 등 군부대가 속속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레 원주는 군부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상권은 원주역 쪽으로 조금 이동했고, 1960년대부터 중앙시장이 상설시장으로 열리기 시작했어요. 한편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가져다 파는 난전, 이른바 ‘양키시장’이 열렸고, 이것이 현대적으로 재건축되며 오늘날 자유시장으로 이어진 겁니다. 군복을 취급하는 매장과 수선집, 미제 물품, 원조받은 밀가루로 만들기 시작한 칼국수와 만두 등, 자유시장의 분위기가 왜 다른 시장과 다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1980년대 이후 원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자유시장 지하에 단골집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겁니다.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군인극장은 오늘날 원주시 보건소 자리에 1961년, 864석 규모로 건립되었었죠. 1973년 원주시청이 일산동에 신축 개관하면서, 군인극장 바로 앞에는 시내와 시청·원주역을 잇는 지하상가가 만들어져 활기를 띄기도 했습니다. 30여 년이 지나며 지하상가는 이제 협동조합광장으로 바뀌어 원주협동조합네트워크의 사무실과 교육장, 카페, 그리고 ‘원주기억저장소’가 운영 중입니다. 협동조합을 배우러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협동조합광장에서 출발해 시내를 순례하게 됩니다. B도로의 밝음신협과 무위당 기념관, 최초로 원주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된 원동성당이 있거든요.
한편 아카데미극장도 언급돼야 합니다. 1960년대 C도로를 따라 개관한 시공관, 아카데미극장, 원주극장, 문화극장은 40년 이상 시민들의 사랑방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쇠락했지만, 마지막으로 남았던 아카데미극장은 시민들의 노력 끝에 얼마 전 보존이 결정되었죠.
또 강원감영 뒤쪽, 보세 옷가게들이 늘어서 ‘로데오거리’라는 관제(!) 명칭이 생겨난 번화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날이면 친구들은 시내에 옷을 사러 나가곤 했어요. 로데오거리 인근은 1980년대까지 ‘풍미당’ 등 유명한 빵집이 있는 호떡골목으로 유명했으니, 세대를 넘나들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아, 지난 토요일에는 강원감영에서 6·10 민주항쟁 34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1987년 원주시민들은 시내에 모여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벌였고, 끝내 승리를 쟁취해냈죠. 지하상가 사거리와 A도로 일대에 사람들이 까맣게 들어찬 흑백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클라우드에도 다양한 추억들이 쌓여 있더군요. 언젠가부터 저는 다른 지역의 친구들이 오면 시내를 구경시켜 줍니다.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등 어떤 계기로 원주시민이 되기로 결심한 분들이 있다면, 역시 시내를 만끽해보시면 좋겠습니다. 1990년대 다른 시가지가 개발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시내는 원주의 중심지거든요. 자유시장 지하는 점심시간마다 만석이고, 장날이면 도로가 미어터지고, 미로예술시장 2층에는 청년들이 가게를 엽니다. 작고 예쁜 카페, 독립영화와 책, 창작스튜디오처럼 시민들을 위한 전시관(지금은 건물 리모델링 중입니다만)도 있고요.
원주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는 곳,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며 삶을 만들어간. 그래서 저는 원주의 ‘쏘울(soul)’이 시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조만간, 시내에서 만나요!
새보미야 |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______한 사람. 프로 백수라 불리곤 하는 프리랜서로, 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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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쏘울’이 담긴 곳, 시내]
원주는 어떤 도시일까요? 원주에서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졸업한 저는 종종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에게 원주를 소개할 일이 생기곤 했습니다. 치악산과 은혜 갚은 꿩의 전설, 군사도시, 특산품 복숭아와 배. 그렇지만 이것들은 막상 춘천 닭갈비, 안동 하회마을, 나주 곰탕, 전주 한옥마을 등에 비하면 ‘전국구’(?) 임팩트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군가는 원주를 ‘무색무취의 도시’라고도 일컫더군요.
수년 간 프리랜서로 원주 곳곳을 다니면서는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5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강원감영과 선화당(宣化堂), 6·25 전쟁의 향방을 갈랐던 원주전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였던 원주캠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작, 생명사상과 협동조합 운동, 미군부대 캠프롱과 나환자 정착촌 대명원의 축산단지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원주식 통닭….
원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중앙동 원도심, ‘원주민’들에게는 ‘시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시내가 원주의 중심지가 되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옛적엔 원주천 배말까지 장삿배와 소금 배가 들어왔고, 원주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있어 농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죠. 태조 4년(1395) 강원감영이 설치되었고, 주변에는 백성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가 모이니 장시(場市)가 섰고요.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부터 원주 읍내장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읍내장은 오늘날까지도 풍물시장 민속 오일장으로 건재하죠. 조금 더 북서쪽, 지금의 국민은행 인근에서는 우시장(牛市場)이 열렸는데, 이 때문에 인근에 한우 골목이 형성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북적였던 원주 시내는 6·25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고 맙니다. 치열했던 원주전투의 여파로 강원감영은 선화당과 포정루만 남았고, 원주역도 원동성당도 원주극장도 모두 파괴되었죠. 이후 1군사령부와 미군부대 캠프롱 등 군부대가 속속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레 원주는 군부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상권은 원주역 쪽으로 조금 이동했고, 1960년대부터 중앙시장이 상설시장으로 열리기 시작했어요. 한편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가져다 파는 난전, 이른바 ‘양키시장’이 열렸고, 이것이 현대적으로 재건축되며 오늘날 자유시장으로 이어진 겁니다. 군복을 취급하는 매장과 수선집, 미제 물품, 원조받은 밀가루로 만들기 시작한 칼국수와 만두 등, 자유시장의 분위기가 왜 다른 시장과 다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1980년대 이후 원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자유시장 지하에 단골집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겁니다.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군인극장은 오늘날 원주시 보건소 자리에 1961년, 864석 규모로 건립되었었죠. 1973년 원주시청이 일산동에 신축 개관하면서, 군인극장 바로 앞에는 시내와 시청·원주역을 잇는 지하상가가 만들어져 활기를 띄기도 했습니다. 30여 년이 지나며 지하상가는 이제 협동조합광장으로 바뀌어 원주협동조합네트워크의 사무실과 교육장, 카페, 그리고 ‘원주기억저장소’가 운영 중입니다. 협동조합을 배우러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협동조합광장에서 출발해 시내를 순례하게 됩니다. B도로의 밝음신협과 무위당 기념관, 최초로 원주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된 원동성당이 있거든요.
한편 아카데미극장도 언급돼야 합니다. 1960년대 C도로를 따라 개관한 시공관, 아카데미극장, 원주극장, 문화극장은 40년 이상 시민들의 사랑방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쇠락했지만, 마지막으로 남았던 아카데미극장은 시민들의 노력 끝에 얼마 전 보존이 결정되었죠.
또 강원감영 뒤쪽, 보세 옷가게들이 늘어서 ‘로데오거리’라는 관제(!) 명칭이 생겨난 번화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날이면 친구들은 시내에 옷을 사러 나가곤 했어요. 로데오거리 인근은 1980년대까지 ‘풍미당’ 등 유명한 빵집이 있는 호떡골목으로 유명했으니, 세대를 넘나들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아, 지난 토요일에는 강원감영에서 6·10 민주항쟁 34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1987년 원주시민들은 시내에 모여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벌였고, 끝내 승리를 쟁취해냈죠. 지하상가 사거리와 A도로 일대에 사람들이 까맣게 들어찬 흑백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클라우드에도 다양한 추억들이 쌓여 있더군요. 언젠가부터 저는 다른 지역의 친구들이 오면 시내를 구경시켜 줍니다.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등 어떤 계기로 원주시민이 되기로 결심한 분들이 있다면, 역시 시내를 만끽해보시면 좋겠습니다. 1990년대 다른 시가지가 개발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시내는 원주의 중심지거든요. 자유시장 지하는 점심시간마다 만석이고, 장날이면 도로가 미어터지고, 미로예술시장 2층에는 청년들이 가게를 엽니다. 작고 예쁜 카페, 독립영화와 책, 창작스튜디오처럼 시민들을 위한 전시관(지금은 건물 리모델링 중입니다만)도 있고요.
원주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는 곳,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며 삶을 만들어간. 그래서 저는 원주의 ‘쏘울(soul)’이 시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조만간, 시내에서 만나요!
새보미야 |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______한 사람. 프로 백수라 불리곤 하는 프리랜서로, 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