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원주 클라우드는 클라우드 게시판에 띄운 주제에 남겨주신 댓글들로 키워드를 뽑았습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김민지, 김대규, 예지, 고루다, 유한솔, 은비, 이경원, 한용구
→ 클라우드 게시판 보러가기
[치악의 추억]
‘꽁드리’를 아시나요? 지난해 시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올해부터 쓰이고 있는 원주시 캐릭터 말입니다. 꽁드리는 자신을 구해준 나그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상원사 종에 머리를 ‘꽁’ 하고 ‘들이’받은 후 머리에 혹이 생겼다는 설정이에요. 머리를 부딪치며 부작용(?)으로 두뇌가 똘똘해지고, 종의 울림이 몸에 남아 내면에 흥이 가득하다는 설명도 있더군요. 익숙한 내용이지요? 맞습니다. 꽁드리는 ‘은혜 갚은 꿩’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예요.
이 전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치악산입니다. 이름부터가 꿩 치(雉) 자를 쓰고 있죠. 꿩의 보은 전설이 기록된 첫 문헌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의 1924년 9월호입니다. 박달성이 쓴 ‘생명의 종소리’라는 제목의 글이었죠. 이어 1926년 심의린이 쓴 최초 한글설화집 『조선동화대집』에도 ‘쌍꿩의 보은’이라는 글이 있었고요. 민속학자 최상수가 발간한 『조선구비전설지』에는 1936년 원주군 원주읍에 거주하던 박동필이라는 사람의 구연을 채록한 ‘치악산과 상원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 채록에 따르면 원래 적악산(赤岳山)이었던 명칭이 꿩을 기리기 위해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치악산이라는 이름이 고려 인종(1145) 시기 편찬된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전설은 최소한 천 년 전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서 깊다 뿐일까요, 치악산은 손꼽히는 명산이기도 합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선비들은 치악을 찬미하곤 했죠. 1585년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읊은 ‘섬강은 어듸메오 치악이 여긔로다’라는 글귀가 딱 떠오르네요.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1751년 편찬한 지리서 『택리지』에서 치악산에 대해 ‘이 산에는 신의 영험이 깃들어 있어 사냥꾼들이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치악산은 잘생긴 산으로, 고매한 사람이 은거하기 좋은 곳이라고도 했죠.
1908년 발표된 이인직의 신소설 「치악산」이라는 작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치악산」은 양반 사회의 폐습과 고부 갈등을 다룬 소설인데요. 주인공인 이 씨는 치악산 밑 홍 참의(參議)의 집으로 시집을 오고, 남편이 일본으로 유학 간 사이 시어머니에 의해 치악산으로 내쫓깁니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치악산은 ‘야만의 산’이라고 묘사됩니다. ‘명랑한 빛도 없고, 기이한 봉우리도 없’는 산, ‘너무 우중충하’지만, ‘웅장하기는 대단히 웅장한 산’이라고요.
치악산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길게 돌아왔네요. 치악산이 영험한 산인지 야만의 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웅장한 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덕분입니다. 대학교 졸업 직후 친구들 함께 처음으로 비로봉에 도전했거든요. 걷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치악산의 명성을 가벼이 여기고 운동화 차림으로 등반을 했다가 말 그대로 죽을 뻔했습니다. 적설이 어찌나 미끄럽던지, 친구가 챙겨온 아이젠을 한 짝씩 나눠 끼고 겨우겨우 올라야 했어요. 사다리병창이 왜 사다리병창이라 이름지어졌는지도 알게 됐죠. 클라우드를 보니 투정, 녹초, 몸살, 시련, 고통, 포기 이런 단어들이 자그맣게 눈에 띄더군요. 다들 비슷하게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고난을 제외한 클라우드의 낱말들은 퍽 친근합니다. 원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교가에 치악이라는 단어가 한 번쯤은 등장했겠죠. 소풍으로 41번 버스를 타고 구룡사 정도는 다녀왔을 테고요. 드림랜드를 기억하신다면 저와 비슷한 연배이실 겁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부모님과 주말에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을지도 모르고요.
그러고 보면 치악산은 원주민이 가진 추억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아요. 개중에는 저희 부모님처럼, 집안의 반대 때문에 친구 몇만 함께 참석한 채 국형사에서 조촐하게 혼인식을 올리셨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도 있고요. 그래서일까요, 치악산을 떠올리면 행복한 기분이 됩니다. 고생 끝에 비로봉에 도달했던 성취의 경험도 경험이지만, 그것들을 아마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절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쌓았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치악산 아래에서 자라고 살아갈 것이고요.
새보미야 |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______한 사람. 프로 백수라 불리곤 하는 프리랜서로, 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김민지, 김대규, 예지, 고루다, 유한솔, 은비, 이경원, 한용구
→ 클라우드 게시판 보러가기
[치악의 추억]
‘꽁드리’를 아시나요? 지난해 시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올해부터 쓰이고 있는 원주시 캐릭터 말입니다. 꽁드리는 자신을 구해준 나그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상원사 종에 머리를 ‘꽁’ 하고 ‘들이’받은 후 머리에 혹이 생겼다는 설정이에요. 머리를 부딪치며 부작용(?)으로 두뇌가 똘똘해지고, 종의 울림이 몸에 남아 내면에 흥이 가득하다는 설명도 있더군요. 익숙한 내용이지요? 맞습니다. 꽁드리는 ‘은혜 갚은 꿩’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예요.
이 전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치악산입니다. 이름부터가 꿩 치(雉) 자를 쓰고 있죠. 꿩의 보은 전설이 기록된 첫 문헌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의 1924년 9월호입니다. 박달성이 쓴 ‘생명의 종소리’라는 제목의 글이었죠. 이어 1926년 심의린이 쓴 최초 한글설화집 『조선동화대집』에도 ‘쌍꿩의 보은’이라는 글이 있었고요. 민속학자 최상수가 발간한 『조선구비전설지』에는 1936년 원주군 원주읍에 거주하던 박동필이라는 사람의 구연을 채록한 ‘치악산과 상원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 채록에 따르면 원래 적악산(赤岳山)이었던 명칭이 꿩을 기리기 위해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치악산이라는 이름이 고려 인종(1145) 시기 편찬된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전설은 최소한 천 년 전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서 깊다 뿐일까요, 치악산은 손꼽히는 명산이기도 합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선비들은 치악을 찬미하곤 했죠. 1585년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읊은 ‘섬강은 어듸메오 치악이 여긔로다’라는 글귀가 딱 떠오르네요.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1751년 편찬한 지리서 『택리지』에서 치악산에 대해 ‘이 산에는 신의 영험이 깃들어 있어 사냥꾼들이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치악산은 잘생긴 산으로, 고매한 사람이 은거하기 좋은 곳이라고도 했죠.
1908년 발표된 이인직의 신소설 「치악산」이라는 작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치악산」은 양반 사회의 폐습과 고부 갈등을 다룬 소설인데요. 주인공인 이 씨는 치악산 밑 홍 참의(參議)의 집으로 시집을 오고, 남편이 일본으로 유학 간 사이 시어머니에 의해 치악산으로 내쫓깁니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치악산은 ‘야만의 산’이라고 묘사됩니다. ‘명랑한 빛도 없고, 기이한 봉우리도 없’는 산, ‘너무 우중충하’지만, ‘웅장하기는 대단히 웅장한 산’이라고요.
치악산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길게 돌아왔네요. 치악산이 영험한 산인지 야만의 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웅장한 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덕분입니다. 대학교 졸업 직후 친구들 함께 처음으로 비로봉에 도전했거든요. 걷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치악산의 명성을 가벼이 여기고 운동화 차림으로 등반을 했다가 말 그대로 죽을 뻔했습니다. 적설이 어찌나 미끄럽던지, 친구가 챙겨온 아이젠을 한 짝씩 나눠 끼고 겨우겨우 올라야 했어요. 사다리병창이 왜 사다리병창이라 이름지어졌는지도 알게 됐죠. 클라우드를 보니 투정, 녹초, 몸살, 시련, 고통, 포기 이런 단어들이 자그맣게 눈에 띄더군요. 다들 비슷하게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고난을 제외한 클라우드의 낱말들은 퍽 친근합니다. 원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교가에 치악이라는 단어가 한 번쯤은 등장했겠죠. 소풍으로 41번 버스를 타고 구룡사 정도는 다녀왔을 테고요. 드림랜드를 기억하신다면 저와 비슷한 연배이실 겁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부모님과 주말에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을지도 모르고요.
그러고 보면 치악산은 원주민이 가진 추억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아요. 개중에는 저희 부모님처럼, 집안의 반대 때문에 친구 몇만 함께 참석한 채 국형사에서 조촐하게 혼인식을 올리셨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도 있고요. 그래서일까요, 치악산을 떠올리면 행복한 기분이 됩니다. 고생 끝에 비로봉에 도달했던 성취의 경험도 경험이지만, 그것들을 아마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절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쌓았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치악산 아래에서 자라고 살아갈 것이고요.
새보미야 |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______한 사람. 프로 백수라 불리곤 하는 프리랜서로, 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