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껍질이라는 이름을 지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어 모어 사용자라면 누구나 친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라는 점. ‘ㅐ’와 ‘ㅔ’처럼 헷갈리는 발음이 아니므로, 잘못 쓸 일은 거의 없겠죠. 둘째, 동시에 한국어 사용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꽤 어려운 낱말이라는 점. ‘귤’, ‘껍’, ‘질’이라는 세 음절 모두 한국어 비사용자가 발음하기도, 표기하기도 까다롭습니다. 마지막으로, 쓸모없(는 것 같)지만 향기롭기 때문이죠. 잘 말려 차로 마실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귤껍질을 소개하는 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쓸모없는 것 같지만 곳다운, 이야기를 수집합니다’.
원주에 있는 1인 출판사, 귤껍질이 진행한 첫 자체 프로젝트가 바로 ‘_____의 작업실’입니다. 편의상 ‘밑줄의 작업실’, 혹은 그냥 ‘작업실 프로젝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_____의 작업실은 매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작자 1팀을 인터뷰해 잡지를 내는 프로젝트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는 해당 창작자(팀)의 이름이 들어가므로 매 호 제목이 달라지죠.
전업 작가를 꿈꾸며 프리랜서 글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작업 공간은 항상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집에서는 통 작업이 되질 않아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 한 달에 카페에만 50만 원 이상을 지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럴 바에야 월세를 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동료와 작업실 겸 공유공간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최근 다시 떠돌이 작업자로 돌아오면서, 문득 다른 사람은 어떻게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공간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세는 부담스럽지 않은지, 건물주와 갈등은 없는지…. 이건 아마 ‘나만의 공간’에 로망이 있는 여러 사람의 궁금증이기도 하겠죠.
그래서 2022년 새해 계획으로 작업실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이를 기록해 보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다만 단행본 형태보다는 좀 더 장기적인 매체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한 창작자들은 사실 온전한 작업 공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불과 몇 달만 지나도 공간이며, 환경이 휙휙 바뀔 수 있죠. 한 번 인터뷰한 팀을 몇 개월 후 다시 만나 변화를 확인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그러기 위해 기한의 정함 없이 정기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짧은 시기에 여러 팀을 만나는 것보다 한 달에 한 팀이라는 최소치를 정해두고 천천히 소개하는 게 인터뷰어의 입장에서도, 독자의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을 것 같았고요.
애초에는 사비로 잡지를 제작해 1천 원 가량의 가격으로 팔 계획이었습니다만, ‘36.5도시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면서 판매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원금으로 제작된 결과물을 판매하는 건 곤란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료로 배포하게 되었죠. 대신 배포 공간은 책방 혹은 책 관련 공간에 한정하기로 했습니다. 다양한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과 만날 수도 있겠지만, 콘텐츠 구매에 대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원사업을 통해 문화적으로 풍성한 도시가 되는 것도 좋지만, 콘텐츠에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경험이 자꾸 누적되는 게 과연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이 있거든요.
인터뷰이 선정은 친분에 치우쳐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고자 인터뷰이의 추천으로 다음 인터뷰이를 섭외하려고 했는데, 막상 그러고 보니 비슷한 장르의 창작자가 잇달게 되더군요. 그래서 ‘전월과 다른 분야의 창작자를 인터뷰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7월 25일에 나온 _____의 작업실 창간호의 인터뷰이는 영상팀 ‘어깨너머’였습니다. 세 명으로 구성된 어깨너머와는 여러모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캠프 롱 기록 사업을 하며 처음 알게 된 이래 독서 모임, 원고 청탁 등 제법 만남을 가져왔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어깨너머의 작업실에 종종 놀러 가 술을 얻어 마시며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기 때문에, 이 팀이 빠진 작업실 잡지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_____의 작업실 기획을 명료화한 2월에 일찌감치 인터뷰를 진행해 버렸어요. 게으름과 모종의 이유로 창간호 제작이 늦어지는 사이 36.5도시 프로젝트에 참가해 보라는 지인의 추천을 받았고, 덕분에 좀 더 뚜렷한 마감과 금전적 여유를 갖고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진 8월호에서는 올해 초 베이스 강습을 들었던 인연으로 베이스기타 제작자 ‘제이클레프바이준’을 인터뷰했어요. 베이스 강습은 우산공단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진행됐는데, 음악과 목공이 어우러졌다는 점이 워낙 특별해서 꼭 소개를 하고 싶더군요.
9월호는 ‘소북소북 페스티벌’에서 라이브 드로잉을 진행한 화가 ‘에스까페아르’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외주나 강의로 수익을 얻지 않으며 작품활동에 몰두하는 화가가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는 아주 즐거웠습니다. 수다와 한탄을 넘나들며 길게 이어진 대화를 글로 옮기면서 허심탄회한 답변과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애썼죠. 결과물은 비교적 만족스러웠지만, 36.5도시 프로젝트가 ‘일상’, ‘활력’뿐만 아니라 ‘네트워킹’에도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인터뷰어·인터뷰이 사이의 교감을 활자만이 아니라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이벤트를 마련해야 할 것 같았고, 결국 전시를 열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인터뷰를 하며 찍은 사진을 인화해 걸고, 관객들이 편하게 앉아 잡지를 읽을 수 있는 방식을 계획했습니다. 해당 인터뷰이의 작업실에서 전시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고요.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인터뷰이의 작업물을 선보이는 방식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작업실이 아닌 공간에서 작업물을 전시한다면, 창작자와 또 다른 공간이 연결되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솔직히 말하자면, 전시를 통해 공간 운영자와 친분을 쌓아 추후 작업실 프로젝트의 인터뷰이로 섭외할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고요. (실제로 인터뷰가 성사되었는지는, 앞으로의 _____의 작업실을 기대해 주세요!)
그 결과 ‘어깨너머의 작업실─휠체어가 못 와요’ 전시는 사진작가 오택 님이 운영하는 미로예술중앙시장 2층 ‘스튜디오둘둘사’에서, ‘제이클레프바이준의 작업실─바이준의 작업실 스토리’는 그래픽디자이너 곽슬미 님과 영화감독 고승현 님이 운영하는 시내 복합문화공간 ‘오후대책’에서, ‘에스까페아르의 작업실─환상의 작업실’은 바리스타 신호섭 님이 운영하는 단계동 카페 ‘sp.red coffee’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공간 운영자 모두가 흔쾌히 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죠. 부수적으로 기획한 전시였던 만큼 규모가 작았고 전시 기간이 원주 관내 여러 행사 일정과 겹친 9월 초순이어서 관람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주 즐겁고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관람객과 나눈 인상적인 대화들도 기억에 남네요.
36.5도시 프로젝트 사업 기간은 종료되었지만, _____의 작업실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이미 10월호가 나왔고 11월호 인터뷰도 마쳤습니다. 12월호, 2023년 1월호 섭외도 완료된 상태예요. 다만 지원사업이 끝난 만큼 앞으로도 무료 배포가 가능할지는 좀 고민해봐야겠지만요.
2022년 10월 현재 _____의 작업실은 △동네책방 코이노니아 △리셋하다 여행자카페 △소브루 작은 책방 △시홍서가 △이서책방 △책방 틔움 △책빵소 △터득골북샵, 총 8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꿈꾸던 나의 작업실을 갖는 그 날까지,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귤껍질
→ 새보미야 @saebomiya
사진
→ 새보미야 @saebomiya
→ 오택 @o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