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길은 자매 두 명(듀이·주채)으로 구성된 팀입니다. 저희는 이주민이에요. 저는 원주에 정착한 지 5·6년이 됐고, 대표인 주채는 이제 갓 1년이 됐어요. 둘 다 직장 때문에 원주에 오게 된 케이스다 보니 주변에 친구도 없고, 지인이라고는 회사 사람밖에 없습니다. 집과 직장만 오가다 보니 아무래도 무기력해지고, 특히 코로나 팬데믹이 오면서 고립이 심해지며 환기의 필요성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또래의 다른 사람을 만나보자고 의기투합했죠. 저희가 보드게임을 워낙 좋아해서 자연스레 콘텐츠도 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살구길은 정말 놀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살구길이라는 이름은 주채가 살고 있는 행구동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예로부터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둑[杏邱]이라 불렸던 동네잖아요. 치악산으로 가는 길에 살구나무들이 반겨주듯, 저희가 즐거움으로 가는 길을 반겨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살구길이라는 이름을 지었죠. 나중에 찾아보니 강원도 방언으로 ‘살구다’가 ‘사귀다’라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여러모로 어감도 좋고, 의미도 좋은 이름인 것 같아요.
문화행사 소식이 뜨는 원주롭다 홈페이지를 매일매일 살펴보다가 36.5도시 프로젝트 소식을 알게 됐어요. 사실 살구길 팀을 만들고 두 차례 다른 지원사업에 도전을 하기도 했는데, 취지에 맞지 않아 탈락을 했었거든요. 36.5도시 프로젝트와는 취지가 맞다고 느꼈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살구길은 36.5도시 프로젝트에서 ‘고독한 보드게임방’이라는 이름으로 총 4회차의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앞선 두 회차는 테이블에 앉아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을 준비했어요. 기존의 보드게임을 기반으로 원주의 내러티브를 담아 새로운 게임을 제작했죠. 치악산 꿩 설화에서 영감을 받은 〈종이 울리기 전에〉, 원주 고지도를 모티브로 삼은 〈치악산 꼬리잡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1회차는 아카데미극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에어컨이 없어 너무 무더웠던 탓에 2회차는 원도심에 위치한 문화공간 오후대책으로 장소를 변경했죠.
3·4회차는 아카데미극장의 공간을 십분 활용해 다양한 게임과 색다른 서사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했습니다. ‘아카데미극장의 탐험’이라는 제목으로, 1963년 아카데미극장에 온 시간여행자들이 파수꾼을 피해 시간의 문을 연다는 콘셉트였죠. 방 탈출의 추리 게임적 요소에 유명 예능 〈뿅뿅 지구오락실〉과 〈런닝맨〉의 느낌을 가미했어요.
게임이 달랐던 만큼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더군요. 종종 노쇼가 있어서 다양한 상황에서도 즐길 수 있도록 게임을 넉넉하게 준비했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저희가 같이 참여하거나 어느 정도 룰을 조정하며 게임을 진행했어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게임을 만드는 것도 생각을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거든요.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준비 과정이 힘들기도 했는데, 참가자 분들이 진짜 게임을 즐겨 주시더라고요. 모든 활동이 그렇겠지만, 사실 참여 주체가 얼마나 적극적인지에 따라 전체 분위기가 많이 결정되잖아요. 특히 게임이라는 특성상 한 사람이라도 어색하게 여기고 참여를 잘 못 한다면 다 같이 재미없어질 수 있는데, 다들 정말 과몰입해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는 거라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많았을 텐데, 참가자들 덕분에 오히려 제가 더 힘을 받을 수 있었고 정말 행복했어요.
원주가 참 재미있는 게, 항상 누군가를 만나면 원주 출신이냐고 물어봐요. 그 자체가 외부인이 많다는 방증인 거잖아요. 특히 청년 세대는 대학이나 직장 때문에 이주해 온 외지인들이 아주 많고요. 20·30대를 대상으로 했던 저희 프로젝트의 참가자들도 대부분 원주에서 놀 거리를 찾는 외지인들이었죠.
원주에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많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가 어린이 위주로 느껴졌거든요. 주요 콘텐츠인 그림책 관련 프로그램도 그렇고, 백운아트홀 등 주요 공간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전시 등도 대부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더라고요. 행사에 가 보고 싶어도 어린이가 있는 가족들 사이에 혼자 멀뚱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청년을 위한 자리가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참가자들의 일상에도 꽤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회차가 끝날 때마다 단체채팅방을 만들었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거든요. 함께 단구동에 있는 보드게임 카페에도 가고, 밥도 먹고, 서로 소개팅도 해 주는 등 꾸준히 연락을 나누고 있죠. 이뿐 아니라 게임 개발에 진심으로 조언도 해 주시고, 방 탈출 시범 운영 때 참여해 주시기도 하셔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 역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게임 생각을 하고, 36.5도시 프로젝트 생각을 하곤 했죠. 두근거리고 설레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이건 노동이 아니잖아요. 일상에 활력을 주는 놀이였고, 또 머릿속으로 구상만 했던 것을 실제로 구현했을 때의 짜릿함이 있었으니까요.
프로젝트를 마친 지금, 살구길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아직 고민 중이에요. 일단은, 원주시 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에서 제안을 받아 감사하게도 한 차례 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어요. 좀 더 큰 세계관을 준비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마 이 글이 업로드되는 11월 12일에 아카데미극장에서 진행될 것 같아요.
앞으로 콘텐츠도 꾸준히 개발하고, 즐거운 자리를 많이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만나고 더 재밌게 놀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니까요.
살구길
→듀이 @coal_wkd
인터뷰 진행 및 글
→ 새보미야 @saebomiya